북한산둘레길 21구간(우이령길)-우이동에서 교현리까지
한 달에 두 번 가는 산행인데, 주춤하던 장마전선이 북상하면서 많은 비가 오겠다는 기상예보다. 이제 오랜 가뭄도 해갈 되었으니, 피해 가주면 좋으련만 심술을 부린다. 설레던 마음은 걱정으로 변하면서 연기도 고려했으나, 오후부터 날씨가 갠다하여 만남의 시간을 2시간 늦춘다. 3년 전, 40년 만에 개방하면서 일정기간 모든 방문객에게 출입을 허용했다. 그 시절에 다녀왔던 옛길 우이령을 다시 넘는다.
밤새 많이 내리던 비는 아침에 소강상태로 들어가더니, 약한 비만 오락가락하니 다행이다. 오전에 일찍 일을 마치고 온 왕자님, 비가 오면 산행하기 곤란하다던 바다님까지 참석해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수유역 3번 출구(11:30)로 나온 일행 5명은 버스로 우이동 종점까지 간다. 둘레길 시작을 알리는 안내판과 이정표(12:00)가 있는 다리를 건너니, 입구가 지하공사 중으로 어수선해 옛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2009년 7월 아내와 함께 통제되기 전에 반대편 교현리에서 출발하여 우이동으로 온지 3년 만에 반대로 오른다. 오르는 주위에는 계곡을 끼고 오래된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입구에서 지원센터까지 1.5km(12:14)를 오르는데, 경사가 반대편 보다 급한 것 같다. 우비를 입을 정도의 많은 비는 내리지 않아, 우산을 쓰고 얕게 내려앉은 구름 속을 가자니 운치가 있다. 우이탐방 지원센터(12:28)에 신고를 한다.
서울에서 자연 생태계 보전이 우수한 지역으로, 이를 위해 탐방인원(일일 예약인원 1,000명)을 제한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 인터넷예약(일일 800명)자에 한해 9:00~14:00까지 출입을 허용(16시까지 하산)한다. 예약을 해보니 평일에는 여유가 있지만, 주말이나 휴일에는 미리 마감된다. 우이령 길 안내(12:45)와 이정표(12:47)를 보면서, 편한 길로 걷자니, 이제는 맨발로(12:48)가도 된다고 한다.
넓은 임도(12:58)는 전쟁 이전에는 경기북부 주민들이 농산물을 우마차에 싣고 서울에 가서 팔고, 생필품을 사오던 오솔길이었다. 전쟁 당시 미군 공병대가 작전도로를 개설하고 나서 차량통행이 가능한 도로가 되었다. 전쟁당시는 피난길로도 사용되었던 우리의 삶과 애환이 담긴 길을 비를 맞으며 걷는다. 비를 흠뻑 먹은 이름 모를 꽃나무(12:59)가 반겨준다.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소귀고개(13:03)이다.
분단국가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전차 장애물(13:04)이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이흥렬 선생이 작사 작곡하여 만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던 바위고개가 이곳을 지칭한다는 문화광장에는 간이무대(13:09)가 설치되어 있다.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사방사업(砂防事業)을 했다는 기념비(13:10)안내문에는 당시 동원되었던 인력과 재화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통제하기 전으로 기념비가 있는 전망 데크(13:12)에는 많은 인파로 인해 오를 수도 없었다. 오봉이 제일 잘 보이는 전망 포인트라 인증 샷을 한 장 찍으려 해도 빈틈이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오늘은 젊은 부부만 외롭게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오봉은 운무로 인하여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간밤에 내린 비로 인하여 내려가는 옆 계곡(13:14)은 힘찬 물소리가 더위를 식혀준다.
계단을 올라 중간쉼터(13:25~14:20)에서 식사를 한다. 비가 오고 늦게 만나다 보니, 조촐한 식단이다. 바다님이 여러 종류의 떡을, 장수보약 안주를 산토끼님이, 신선한 과일은 샛별님이, 푸짐하여 다 먹지도 못한다. 식사하며 산토끼님 왈 “초등학교 동창들이 이렇게 나이가 들어 산에서 식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란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교현리 에서 올라오는 차량의 진입을 막는 통제소(14:27)이다.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삼거리에는 현역 군인들의 유격장(14:30)이 있다. 소귀고개서부터 함성이 들려와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했더니, 유격장 연병장에서 군인들이 기마전을 벌리고 있다. 우리들의 경험은 까마득한 추억이 되고, 자식들이 유격훈련을 받는다는 소식에 걱정했던 것도 이제는 오래된 기억으로 가슴을 찡하게 한다. 평일에 와서 유격 훈련하는 모습을 보니 젊음의 패기가 부럽다.
석굴암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로 오늘의 코스 중에서는 제일 어려운 구간이다. 가는 길 가에는 각종의 유격훈련 시설(14:39)들이 있어, 그룹별로 이동하면서 훈련을 받고 일반인의 접근을 금한다. 석굴암 일주문(14:40)을 지나니, 불사에 도움을 준 신도들에게 감사하는 공덕비(14:43)가 세워져 있다. 오봉아래 아담하게 자리한 천년 고찰 양주 오봉산 석굴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전에 없던 마니보륜(摩尼寶輪, 14:45)이 있는 누각이 보인다. 고려 공민왕 때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선사가 3년간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대웅전과 부속 건물(14:48)들이 도봉산 산세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 범종각 위로 오봉의 일부(14:50)가 수줍은 듯 살며시 얼굴을 내밀다가 숨기를 반복한다. 비가 그친 뒤 운무 속의 풍경은 산수화를 보는 듯 제일 멋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위로 올라가 나한전(14:59)을 보니, 커다란 바위 밑에 넓은 법당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이곳에서 보는 건너편 상장능선과 북한산 풍경이 아름다워, 해마다 가을이 되면 단풍음악제가 열린다고 한다. 석굴암 삼거리 다리(15:18)로 회귀하니, 다른 모습의 훈련을 받고 있다. 평탄한 내리막 도로(15:19)를 따라 교현 탐방지원센터를 향해 간다. 오고 가는 산객들이 전혀 없으니, 사전 예약제도가 무의미할 정도이다.
두 번째 전망 데크(15:22)에서 오봉을 보니, 운무로 인해 전혀 보이지 않는다. 3년 전에 찍은 오봉(660m) 사진과 함께 그 유래를 살펴보니, 한마을에 사는 다섯 총각들이 원님의 어여쁜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기 위해 상장능선(오봉과 마주한 건너편 능선)의 바위를 오봉에 던져 올리기 시합을 해서 현재의 기묘한 모습의 봉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출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정표(15:29)가 말한다.
싱그러운 숲 속 임도(15:31)를 내려오며, 민간인 출입을 금지 시키게 되었던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김신조)사건을 회상해 본다. 입학시험을 치루고 집에 와서 밤새 무서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에 있는 우이령을 넘어 교현 탐방지원센터(15:51)에 도착하니 가벼운 산행의 종료를 예고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고 자랐던 시골풍경 그대로인 교현리 우이령 입구(15:58)이다.
북한산 둘레 길을 이제 시작하였으니, 언젠가는 다시 이곳을 지나쳐야 할 둘레길 이정표(15:58)이다. 석굴암 입구 정류장(16:00)에서 버스를 타고 불광역에서 내려, 1번 출구 안쪽에 있는 먹자골목 한 음식점에서 뒤풀이(16:47)를 갖고 귀가한다. 점심시간에 나누었던 이야기들 중에 시골 초등학교 동창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어울려 자연 속에서 보낼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낀 하루였다.
‘12. 7. 11(水). 우이령길 산행을 마치고서....